2009. 8. 9. 23:30
 

오늘날 불교이론에 의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여 존재하며
나라는 것도 무상하여 결국 사라지므로 나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나의 실체가 없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부처님은 현생에서 지은 것은 인과의 법에 의해 후생의 나에게 어김없이 이어지므로
팔정도로 심신을 닦고 공덕을 쌓으면 마침내 그 선근이 완성되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열심히 노력하는 제자들에게 부처가 될 거라는 수기를 주셨던 것이다.

만약 무아론의 논리대로 나의 실체가 없다면 좋은 공덕과 선근을 익혀
다음 생에 부처가 될 수기를 받는 윤회의 주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모든 나쁜 원인을 짓지 말고 모든 좋은 원인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는 칠불통계(諸惡莫作 衆善奉行)의 근거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무아설이 오늘날 불교의 기본 입장이라고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법무아는 불교의 기본원리로 윗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영혼의 실체에 대한 문제는 부처님이 논의를 거부했던 14무기 속에 들어있는 사항인데
후대 논사들에 의해 제법무아라는 결론으로 오늘날 불교의 윗자리에 당당히 자리잡고 있는 것은
그 정의가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부처님은 영원히 불변하는 나의 실체는 없지만
윤회를 통하여 경험의 지속성과 통일성을 가지며 변전하는 윤회의 주체는 있다고 말하셨다.

불경에서는 이를 비유로써 모순없이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많은 고리로 이루어진 사슬을 생각해보면
비록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연속적으로 이어진 가닥은 없지만,
각 고리가 서로 끊어지지 않고 하나의 사슬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고리 사이의 연결이 있어 동일체로서 연속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고 있는 인간의 단일성과 지속성도 같은 것은 아니지만
긴밀한 인과적 연결에 의하여 이어지기에 전체적으로 동일성을 유지되는 것이다.

다른 예로, 촛불을 생각해보자.
촛불은 단일한 불꽃으로 지속적인 빛을 주며 하나의 촛불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불꽃은 매순간 마다 타오르는 밑부분의 기름이 다른 것이니
현재의 빛과 과거의 빛과 미래의 빛이 같은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앞의 불꽃과 곧바로 이어지는 뒷 불꽃 사이에
앞이 없으면 뒤가 존재할 수 없는 긴밀한 인과적 연결이 있기에
불꽃이 하나로서 인식되는 것이다.

영혼도 이와 같다.

그동안 윤회주체와 관련한 논쟁은 초기불교 이래로 수천년간 이어져 왔으며
아직까지 명백히 밝혀지지 않아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러한 철학적 논란 대신에
의식과 윤회와 의식의 주체에 대한 실상을 밝힘으로써
무아의 논의에 대한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부처님의 법은 추상적 논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의 진실을 밝힘으로써 모든 희론을 잠재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은 기운의 형태 속에 의식이 깃들어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살아있을 때 육체 속에 거주하면서
완전한 인과법에 따라 삶의 모든 경험을 자신 속에 담게 되고
죽어서는 그 사람의 결실로 분리되어 이 법계를 맴돌며 후생의 원인이 된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영혼이라고 한다.

이렇게 한 인간의 삶의 결과로 나타나는 영혼은 자신이 지은 업과 인연에 따라 후생을 받게 되는데
성경말씀처럼 잘 지은 열매는 풍성한 수확을 낳고 잘못된 쭉정이는 버려지게 된다.

즉 욕망과 잘못된 삶으로 한과 집착 속에 죽은 이는
그 영혼이 편히 쉬지 못하고 지옥의 환상 속에서 고통을 받다 흩어지거나 소멸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 인간의 근본을 크게 망치지 않은 사람은
다시 인간으로 나며 그보다 더욱 승화한 자는 더 높은 차원인 천상에 나게 되는 것이다.

즉 바른 삶의 길을 알고 좋은 원인을 지은 자는 그 영혼이 맑고 깨끗해져
가벼운 것은 높이 오르는 자연의 원리에 의해 천상에 오르며
그 좋은 선근으로 말미암아 밝은 지혜와 좋은 마음을 지니고 태어나
마침내 해탈이라는 인간완성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순환과 재생의 흐름 속에는 우주 탄생의 비밀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반야의 관문이 있다.

즉 한알의 밀알이 완전히 썩지 않고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없듯이
모든 인간이나 신도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근원의 세계 속에 자신을 묻어야 하는데
이때 통과하는 관문을 반야라 한다.

즉, 사람이 죽으면 윤회하게 되는 영혼은
죽음과 더불어 깊은 잠에 빠지면서 반야로 스며들게 되는데
이곳에서 기존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현상인 것이다.

이곳은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근원의 자리여서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는 통과하지 못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자중에서는 모든 업이 사라져 마음이 청정해진 사람만이 이곳에 들 수 있으며
이곳에 든 자는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이며
근원에 닿을 수 있는 그 맑은 마음이 모든 것과 통하여 모든 법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에도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다에 듦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을 통과하여 새롭게 태어난 영혼은 깨끗한 상태로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런 관계로 새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잊고 백지상태로 태어나는 것이정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때 과거의 모든 기억은 사라지지만
과거 자신이 습득했던 지혜와 성품과 자질 등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

그것은 마치 콩을 심을 때 그 출생지가 어디인지 몰라도
콩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 그콩이 어떤 품종이며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사람도 과거에 그가 누구였는지 알 수가 없지만 그 사람의 성품과 기질을 보면
과거에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윤회의 흐름 속에는 육도를 오고가는 영혼의 이합집산이 있어
전생의 나와 후생의 내가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가 더욱 어렵다.

윤회의 흐름에서 인간의 영혼도 다른 생명체와 똑같은 생명의 질서에 의해 규율받는다.
그래서 가벼운 것은 높이 오르고 무거운 것은 낮은 곳으로 가라앉으며
약하고 희미한 것은 흩어지는 이치에 의해
승화한 영혼은 높이 오르며 타락한 영혼은 무거워 낮은 곳을 헤매다
고통 속에 흩어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때 완성으로 나아가는 영혼은 그 의식이 맑게 정화되어 점점 결정체(해탈심)가 되어가나
유계를 헤매는 영혼들은 인간의 근본도 간직하지 못하고 흩어져
미물의 영체나 풀의 기운이 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

마치 고등생물의 경우 종자를 적게 낳으나 하등생물은 많은 종자를 퍼뜨리는 것과 같은 현상이
인간의 영혼세계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니
인간의 영혼도 엄정한 생명의 질서에 의해 흩어져 다른 많은 생명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미물의 영체가 승화해 인간의 영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영혼이 후생의 영혼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다.
부처님이 영혼과 아의 실체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도 아가 아니고 저것도 아가 아니라고 아에 대한 단정을 피하셨으며(14무기)
나의 실체가 없다는 무아론은 주장하지는 않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이론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무아론이 정통이 되어 있으니
그 왜곡됨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실상이 이렇다고 하자, 기존에 윤회로 인한 동일성을 굳게 믿던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이 존엄성도 없이 인과의 질서에 의해 산술적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서로 알지 못한다면
지금의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미래의 나에게 미안하거나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서로 간에 기억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며
그 업은 완전한 인과법에 의해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다.

양지바른 곳에서 좋은 거름을 받아 잘 자란 콩은 반드시 다음번에 더 많은 콩을 맺고
황량한 곳에서 비실거리며 자란 콩은 반드시 쭉정이가 많듯이
앞뒤간에 기억은 이어지지 않아도 과거에 지은 일들은 반드시 후생에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니
양심있고 이성있는 자라면 자신이 지은 원인이 가져올 필연적인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져야 하는 것은,
그가 공중에서 펑하고 태어난 우주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인과적 고리로 이어지는 동일 연속선 상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하늘위로
2009. 8. 9. 23:28



 

남자친구에게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했는데 오해를 사서 이별을 당했습니다. 수개월이 지난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에게 다가가 진실을 털어놓고 싶은데 지금 서로의 처지가 좋지 않습니다. 또 많은 시간이 흘러가버려 용기 또한 나지 않습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이러저러한 현실 때문에 그에게 다가가기가 두렵습니다.

 

상대를 사랑한다면 상대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세요. 말할 시기 너무 고르지 말고 먼저 전화 걸어서 만나서 얘기 좀 하자고 해 보세요. 만나기 싫다고 하면 전화로라도 얘기할 테니 시간 좀 내라고 얘기해 보고 그것도 싫다면 끊고, 얼마 있다가 또 한 번 더 해 보고 그 때도 싫다고 하면, 얼마 있다가 또 해 보세요. 이렇게 끙끙 대며 하루를 보내는 것보다는 실제로 시도해서 한 3분 보내는 게 시간을 훨씬 효과적으로 쓰는 겁니다. 우리는 대부분 끙끙 대는 데 시간을 다 보내요.

 

나는 해명하고 싶은데 상대가 듣기 싫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대를 사랑한다면 상대의 의사를 당연히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사랑이라는 대부분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내가 해명하면 상대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에게 크게 잘못해 놓고 내가 사과했는데 상대가 사과를 받지 않으면 오히려 성질냅니다. ‘내가 사과하는데 안 받아줘?’ 이런 마음이 있단 말이에요. 이건 상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겁니다.

 

이렇게 망설이는 자기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봐야 합니다. 질문하신 분은 지금 상대에 대한 고려가 없습니다. 산에 올라갔다가 꽃이 예쁘다고 꺾어오는 사람하고 같아요. 꽃이 좋으면 그냥 보고 좋아하지 꺾긴 왜 꺾습니까? 꽃의 입장에서도 꺾이는 것이 좋은지 물어봐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쁜 꽃이 있으면 꺾어버린단 말이에요. 그것이 우리가 일방적이라는 반증입니다. 꽃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거든요. ‘내가 너를 좋아하면 네 목을 꺾더라도 너는 참아야 해, 너는 나를 따라야 해.’ 이런 생각이거든요. ‘내가 너를 좋아하는데 네가 어떻게 감히’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답답한 거예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전화하는 것이 상대를 위해서일까요, 답답한 자신을 위해서일까요? 본인이 답답해서 전화하는 거예요. 이것은 본인 문제예요. 상대편 문제가 아니에요. 상대를 고려하는 게 아니에요. 자신의 문제니까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내가 음식이 먹고 싶으면 가서 사먹듯이 내가 보고 싶으니까 전화하는 거예요. 열 번 거절하든 백 번 거절하든 그것은 그 사람 문제이고 나는 보고 싶으면 계속 전화하면 됩니다. 이러면 스토커가 됩니다. 이때 스토커가 된 자신을 스스로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그랬구나, 상대가 싫다는데 내가 좋아서 그랬구나, 산에 가서 꽃을 꺾듯이 내 마음대로 했구나.’ 하고 인정하면 됩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까지 괴롭힐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몇 번 해 보고 상대의 의사가 나와 다르다면 ‘나는 네가 좋지만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럼 알았다.’ 하고 놓아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혼자서 끙끙 대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이것은 상대를 고려하기 때문에 끙끙 대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든 내 욕심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서 끙끙 대는 것입니다. 이렇게 끙끙 대면 기회도 놓치고 본인만 괴롭습니다.

 

오늘 전화를 하세요. 전화해서 상대의 뜻을 일단 물어보세요. 어쩌면 상대도 당신을 만나려고 기다릴지도 모르지요. 누구나 한 번쯤은 마음에 있으면서도 한 번 거절했는데 상대가 다시 전화해주지 않으면 속으로 후회한 경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를 생각해서 몇 번쯤은 해 보세요. ‘세 번쯤 해서 확인해 보고, 그래도 싫다고 하면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자.’ 하고 가볍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포기하고 있다가 한 1년 후쯤 생각나면 또 한 번 해 보는 거예요. 그러다가 또 한 3년 있다가 생각나면 또 해 보는 거예요. 속으로 끙끙 대면 에너지만 많이 소모할 뿐입니다.

 

상대를 존중하면서도 가볍게 생각하고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하늘위로
2009. 8. 9. 19:44

◎ 부모와 자식간의 네가지 인연 ◎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네가지 인연이 있다오.

첫째는 은혜를 갚는 인연이고,

둘째는 원한을 갚는 인연이며,

셋째는 빚을 갚는 인연이고,

넷째는 빚을 되찾는 인연이오.

은혜를 갚는 인연(報恩)이란,
부모와 자식에게 전생에 큰 은혜가 있어,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금생에 자식으로 태어나,
생전에 부모가 기뻐하도록 극진히 봉양하고, 사후에는 귀신이 흠향하도록 장례와 제사를 정성껏 모시는 것이오.
나아가 국가 사회에 이바지 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끼쳐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김으로써,
천하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을 흠모하면서,
그 부모까지 존경하도록 훌륭한 도덕을 닦기도 하오. 역사 속의 수많은 충신과 효자가 그러하오.

원한을 갚는 인연(報怨),
부모가 자식에게 전생에 원한을 사서,
그걸 갚기 위해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이오.
작게는 부모 마음을 거스르고, 크게는 화가 부모에게 미치게 하며,
살아 생전에는 맛있고 따뜻한 봉양을 올리지 않고, 죽은 위에는 황천에서도 모욕을 당하게 하오.
또 더 심한 경우에는 권세나 요직에 앉은 신분으로 부정 부패와 불궤(不軌)의 죄악을 저질러,
가문과 친족을 파멸시키고 조상의 무덤까지 파헤치게 하며,
천하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을 욕하면서 그 부모에게 침 뱉게 만드오.
왕망이나 조조, 동탁, 진회등과 같은 간신 역적이 그 대표적인 예라오.

빚을 갚는 인연(償債)이란,
자식이 전생에 부모에게 진 재산상의 빚을 갚으려고 태어난 경우라오.
진 빚이 많으면 평생토록 뼈 빠지게 일해 받들어 모시지만,
빚이 적으면 잘 봉양하다가 더러 중간에 그만두기도 하오.
예컨데 힘들여 공부하여 부귀공명을 조금 얻는가 싶더니 그만 요절한다든지,
사업이 잘되어 재산 좀 모으다가 죽는 수도 있소.

빚을 되찾는 인연(討債)이란,
부모가 자식에게 전생에 재산상의 빚을 진 까닭에 그 빚을 받으려고 태어난 경우라오.
빚이 적으면, 생활비나 학비를 들여 가르치고, 혼수 장만하여 결혼시켜,
이제 자립하고 사회 활동을 할 만하니 그만 수명이 다해 버리는 것이오.
또 빚이 많으면 집안 재산을 탕진하고 패가 망신까지 시킨다오.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운 재난을 당하면,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탓하기 일쑤요.
전생에 진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죄업을 참회하는 마음을 내는 이는 참으로 드물기 짝이 없소.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는 줄을 알아야 하오.
가라지를 심고 밀을 거두고자 하거나 피를 씨 뿌리고 벼를 거둘 생각은 말아야 하오.


Posted by 하늘위로
2009. 7. 26. 21:07



제가 두려움이 너무 많고 눈치를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도 못하고 저에게 하는 싫은 소리도 소화해 내지 못합니다. 저번에 제가 질문 드렸더니 스님께서 남편에게 먼저 싫은 소리를 한번 해 보라고 하셔서 해 보았는데, ‘너는 네가 원하는 것만 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질문하신 분은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하는 사람이 아니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자기는 남을 배려해서 남에게 싫은 소리도 못하고 언제나 손해 보는 인간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해결책이 안 나는 겁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것은 본인이 상대를 배려해서 그런 게 아니고 너무 이기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상대에게 어떤 얘기를 하면 상대가 내 말을 꼭 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한 거예요. 그래서 눈치를 보면서 안 들어줄 것 같은 생각이 들면 말을 안 하는 거예요. 이건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려는 거예요. 그런데 원하는 대로 안 되면 입을 딱 다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이 적고 굉장히 착해 보이지요. ‘착한 여자 무섭다.’ 라는 말이 있어요. 착한 여자는 황소고집인데 그 이유는 자기가 고집이 센 줄 모르기 때문이에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착하다고 칭찬하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해요. 착한 여자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보따리 싸서 나간다든지 하는 일을 저지릅니다. 착한 여자가 진짜 착한 게 아니에요. 자아가 엄청나게 강하기 때문에 그래요. 남편한테 대들고 싸움을 못 하는 이유가 ‘너 같은 인간 하고 싸우는 내 자신’이 용납이 안 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겉으로는 그냥 입 다물고 있지만 속으로는 ‘너는 인간도 아니다.’ 이렇게 멸시하고 있지요.

 

 

내가 어떤 얘기를 할 때 상대가 내 얘기에 동의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지금부터 버리세요. 내가 상대에게 어떻게 해달라고 말할 때, 그것은 나의 생각이고 나의 요구입니다. 그걸 상대가 들어줘야 할 어떤 이유도 없어요.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는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내 요구에 대한 결벽성과 완벽성 때문에 말을 못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남편이 뭐라고 하든 하고 싶은 말을 그냥 해버리세요. 그러면 상대방이 싫다고 할 거예요. 그때 상대가 싫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편이 “너는 너밖에 몰라.” 하면 “그래, 당신 말이 맞네, 듣고 보니 나는 나밖에 모르네.” 이렇게 받아들이란 말이에요. 그러면서 내일 또 얘기해 버려요. 그러면 “넌 너밖에 모른다고 내가 얘기해줬는데도 계속 그렇게 할래?” 하면 “그래 맞아, 그렇네.” 하며 받아들여요. 이렇게 상대를 통해서 내 모습을 찾아가야 해요. 이런 지적을 계속 받으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연습을 하는 거예요.

 

 

내가 내 속에 있는 말을 못하는 것은 상대편 때문에 못하는 게 아니라 내 결벽성 때문에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어나는 생각대로 계속 말을 내뱉어버려요. 그렇게 계속 내뱉으면 상대로부터 비판이 들어오겠죠? 그것을 비판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상대편의 뜻으로 받아들이세요. 그렇게 교감을 해나가면 상대와 진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본인도 자기 말을 마음껏 할 수 있고 상대의 의견도 다 들어줄 수가 있는 열린 자세가 되는 거예요. 지금 마음이 꽉 닫혀 있어서 자꾸 연습을 해야 합니다.

 

 

‘당신은 이기적이다.’라는 남편의 말에 자책하지 말고, ‘그래,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야’ 이렇게 받아들이세요.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이게 진실이에요. ‘나는 남을 위하는 사람이다.’ 이건 거짓이에요.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임을 인정할 때, 상대도 마찬가지임을 알고 그를 이해하게 되지요. 이렇게 진실을 알아가는 거예요. ‘좋다, 싫다, 나쁘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응, 그래. 가만히 살펴보니 내가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네.’ 이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계속 부딪쳐 보면서 수행해 나가세요.

Posted by 하늘위로
2009. 7. 26. 21:01
3) 아침에는 108배, 자기 전엔 염불

이제 108번뇌와 108배의 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08염주를 지니는 까닭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불자들 중에는 108염주를 매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이 108염주는 액세서리가 아니다. 108번의 염불과 108배를 통하여 108번뇌로써 지은 죄업들을 참회하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부처님 앞에 한 번 절하고 한 개 돌리기를 108번하면서 108번뇌를 끊어 나가라고 108염주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108번뇌가 완전히 소멸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최종 목적인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은 매일 108배를 생활화하는 것이 좋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108배, 저녁에 자기 전에는 108염불! 이것을 생활화하면 마음이 점차 모이고 맑아져서 언젠가는 삼매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불보살의 은근한 가피, 곧 명훈가피를 얻어 재난은 스스로 피해 가고 가정은 두루 편안해지며, 기쁨과 행복이 충만해지게 되는 것이다.
만일 집에서 108배를 할 여건이 되지 않은 경우라면 절을 찾을 때만이라도 꼭 108배를 하도록 하자. "절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사찰을 절이라고 부른다."는 속설이 있듯이, 좋은 도량을 찾았을 때만이라도 법당의 부처님께 지극 정성 108배를 올리는 신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제 아침 108배, 저녁 잠들기 전의 기도를 통하여 소원을 이룬 세 고시생의 이야기를 하면서 제 2장의 '생활 속의 기도법'에 대한 글은 매듭짓고자 한다.

약 10여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재가 불자의 참선 수련 도량으로 바뀌었지만 당시 해인사 원당암은 고시생들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원당암에서 공부하여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10여 년 동안 50명도 넘었기 때문이다. 자연 방을 얻으려는 경쟁이 치열해지자, "돈을 2배, 3배 주겠으니 있게 해 달라."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원당암 스님들이 누구인가? 오히려 네 가지 규칙을 정하여 그 규칙을 준수하겠다는 사람들만 받아들였다.
첫째, 새벽 예불에 참석해야 한다.
둘째, 술과 담배를 먹지 못한다.
셋째, 여자 친구의 방문은 사절한다.
넷째, 주지 스님 허락 없이는 바깥출입을 금한다.
처음 이렇게 다짐하고 원당암에 있게 된 고시생 중, 3명의 학생이 몰래 해인사 관광촌으로 내려가서 한잔 먹다가 주지 스님께 들키고 말았다.
"이놈들! 당장 원당암에서 나가거라."
책보따리를 절 마당에 들어내 놓고 몽둥이를 잡은 채 호령하는 주지 스님의 서슬에 놀라 그들은 암자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집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세 사람은 궁리 끝에 나를 찾아왔다.
"저 위의 지족암 큰스님께 찾아가 보자. 혹시 거지 있으라고 할지도 모르잖아."
그러나 방이 없는 지족암에 '있으라'고 할 수도 없는 일, 나는 잠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희들, 사법고시에 꼭 합격하고 싶지?"
"예!"
"그런데 공부는 잘 되지 않고?"
"예, 공부하기가 통 싫습니다."
"내가 공부하고 싶도록 해줄까? 공부 잘 되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어떻게요?"
"너희 마음대로 안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부처님의 법 아닌가! 내가 시키는 방법대로 해볼테냐?"
"예, 공부만 잘 된다면 하지요."
"첫째, 너희들이 절에 와 있으니까 부처님께 절을 해야 한다. 새벽 예불 목탁 소리가 나거든 무조건 법당으로 달려가서 절 108배를 해라. 108배를 하면 아침에 국민 체조를 하는 것보다 더 좋다. 몸이 아주 건강해진다. 손가락 발가락까지도 운동이 다 되고 목운동 허리 운동 발목 운동 온 전신운동이 다 되는 것이니까. 운동 가운데 절하는 운동보다 더 좋은 운동이 없다. 할 수 있겠느냐?"
"예."
"이렇게 부처님께 108배를 드리면서 '부처님, 공부 재미있게 해주십시오. 공부 재미있게 해주십시오. 시험에 꼭 붙게 해주십시오.....' 하면서 간절히 기원해야 한다."
"두 번째 잠들기 직전에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자는 것이다. 먼저 코로 심호흡을 세 번 또는 일곱 번하고, 관세음보살을 아주 빨리, 108번을 불러라. 처음에는 3-40번밖에 못 부를 것이지만 일단 한숨 동안 부르고 나서 '관세음보살님! 꼭 시험에 되게 해주십시오. 공부 잘 됩니다. 공부가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3번 기원을 해라. 그렇게 한숨에 염불을 세 번 또는 일곱 번 정도 하여야 한다."
"스님, 왜 관세음보살을 그렇게 빨리 불러야 합니까?"
"관세음보살을 천천히 부르면 생각이 서울 갔다가 대전 갔다가 부산 갔다가, 왔다갔다하게 된다. 그럼 효과가 없어. 관세음보살을 아주 빨리 부르면, 부르기 급한데 어디 갈 여가가 있나? 생각이 도망칠 틈이 없게 되고 마음이 하나로 모이니까 틀림없이 힘이 모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공부를 하다가 정신이 흐릿해지거나 마음이 풀어질 때에도 이렇게 관세음보살을 불러 보아라.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학생들은 아주 좋아하면서 꼭 실천하겠다고 다짐하였고, 나는 그들을 데리고 원당암으로 가서 주지 스님에게 부탁하였다.
"학생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하니 한 번만 용서하시오."
그날부터 시험 치기 전까지 약 100일 동안 세 학생은 기도와 공부를 부지런히 하였고, 마침내 세 사람 모두 사법고시에 합격하였다. 기쁨에 넘친 그들은 법관 교육을 받기 위해 사법연수원으로 가기 직전, 커다란 케익을 사 들고 나에게로 찾아왔다. 그리고 시험장에서 있었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스님, 시험장에 앉아 주위를 돌아보니 모두가 백짓장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얼굴을 가진 사람은 저희들뿐인 듯했습니다. 저희들은 시험지가 나오기까지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님, 막상 시험문제를 받고 보니 거기에 기적이 있었습니다. 원당암 앞길을 산책하다가 갑자기, '아차! 그 문제 한 번 더 보아야겠다.'고하여 꼼꼼히 살펴본 문제, 부처님께 절하다가 생각이 나서 한 번 더 찾아본 문제 등, 일부러 기억하고 거듭거듭 따져 봤던 문제들만 출제되어 있었습니다. 어찌 저희들이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스님, 감사합니다. 모두가 스님 덕입니다."
"나도 너희들 덕에 법문할 이야깃거리가 하나 더 생겼구나. 나도 너희들에게 감사한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웃음꽃을 피웠다.

이 산승은 간곡히 당부 드린다. 지금 현재 앞에서 이야기한 일상의 기도를 하지 않고 있는 불자라면 이 기회에 꼭 실천해 보라는 것을!

기한은 스스로의 형편에 맞게 정하라. 백일을 하나의 기한으로 삼아도 좋고, 40일을 기한으로 삼아도 좋다. 그것도 어렵다면 삼칠일[21일], 21일도 어렵다면 일주일, 아니 단 3일이라도 좋다. 꼭 한 번 해보자. 틀림없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건강도 좋아질 것이며, 소원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뒷날로 미루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한마음으로 염불하며, 신심(信心)을 이루고 뜻을 성취하기 바란다.


Posted by 하늘위로
2009. 7. 26. 20:57
2) 108번뇌와 108배

불교의 절하는 숫자에 대한 근거는 뚜렷하다.

3배를 드리는 것은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탐심, 진심, 치심의 삼독심(三毒心)을 끊고 삼학(三學, 戒, 定, 慧)을 닦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고, 53배는 참회 53불(佛)에 대한 경배, 1천배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겁(賢劫)의 1천 부처님께 1배씩 절을 올리는 것이며, 3천배는 과거, 현재, 미래의 3대겁에 출현하는 3천 부처님께 1배씩의 절을 올리는 예법이다.

그렇다면 108배는 무엇인가? 바로 이 절이 108번뇌의 소멸과 관련되어 있음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108이라는 숫자가 108번뇌를 뜻한다는 것은 쉽게 파악하면서도, 어떻게 해서 중생의 번뇌를 108이라는 숫자로 분류하였는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108번뇌는 중생의 근본 번뇌이다. 이 108번뇌는 육근(六根)과 육진(六塵: 六境이라고도 함)이 서로 만날 때 생겨난다.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뜻[意]의 육근이 색깔[色], 소리[聲], 향기[香], 맛[味], 감촉[觸], 법[法]의 6진을 상대할 때 먼저 좋다[好], 나쁘다[惡], 좋지도 싫지도 않다[平等]는 세 가지 인식 작용을 일으킨다.
그리고 다시 좋은 것은 즐겁게 받아들이고[樂受], 나쁜 것은 괴롭게 받아들이며[苦受],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것에 대하여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게 방치하는[捨受] 것이다.
곧 6근과 6진의 하나 하나가 부딪칠 때 좋고[好], 나쁘고[惡], 평등하고[平等], 괴롭고[苦], 즐겁고[樂], 버리는[捨] 여섯 가지 감각이 나타나기 때문에, 6*6=36, 즉 서른여섯가지의 번뇌가 생겨나게 된다.

이 36번뇌를 중생은 과거에도 했었고, 현재에도 하고 있고 미래에도 할 것이기 때문에, 6*6=36에 과거, 현재, 미래의 3을 곱하여 108번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
| 六 根 六 塵 |
| |
| 눈[眼] 색깔[色] |
| 귀[耳] 소리[聲] |
| 코[鼻] 향기[香] |
| 혀[舌] 맛[味] |
| 몸[身] 감촉[觸] |
| 뜻[意] 법[法] |
| |
| 好, 惡, 平等, 苦, 樂, 捨 (6*6=36) |
| * |
| 과거, 현재, 미래 (36*3) |
| |
| 108번뇌 |
+--------------------------------------+

이와 같은 108번뇌가 벌어지고 또 벌어져서 팔만 사천 번뇌 망상을 이루게 되고, 그 번뇌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무수히 왔다갔다하면서 마음을 흐트려놓기 때문에 중생은 번뇌로 인해 시달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08번뇌! 이것은 우리의 흩어진 마음을 뜻한다. 하나로 모아진 마음이 아니라 바깥으로 흩어진 마음, 근원을 돌아보는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 내려가는 유전(流轉)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108번뇌와 깊이 결속되어 있는 삶이 중생의 삶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108번뇌는 108번의 절을 하는 동안 스스로 순화되어 삼매의 힘으로 변화된다.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일심의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환멸(還滅)의 시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무한한 능력,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이 번뇌를 따라 밖으로 밖으로 뿔뿔이 흩어질 때는 무능에 빠지고 끝없는 생사의 유전 속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번뇌 속으로 끊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을 때 삼매의 힘은 다시 되살아나고, 원래의 무한 능력이 우리에게서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108배로써 108번뇌를 끊는다."

이 108배속에는 번뇌를 쫓아 흘러 내려가는 삶을 일심의 원천으로 돌리겠다는 의지가 숨겨져 있다. 유전이 아니라 환멸의 삶, 번뇌 이전의 영원 생명으로 돌아가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삶, 곧 성불(成佛)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번뇌는 끊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하나로 모을 때 번뇌는 저절로 사라진다. 108배의 절은 번뇌를 끊는 의식이 아니라 깊은 삼매(三昧)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방편이다. 우리가 매일매일 108배의 정진을 통하여 삼매 속으로 몰입할 때 우리의 모든 번뇌는 차츰 사라지게 된다.
삼매와 환멸과 성불! 이것이 우리가 108배를 하는 까닭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Posted by 하늘위로
2009. 7. 26. 20:53
108배 기도

1) 왜 절을 하라고 하는가?
잠자기 전의 기도 외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훌륭한 기도 법으로는 절을 하는 방법이 있다.
왜 우리 불교에서는 절할 것을 권하는 것일까?

첫째는 절을 통하여 아상(我相)을 꺾고 복밭(福田)을 이루기 위함이다.
인간의 모든 그릇된 업은 아상에서 비롯된다. '나다', '내가 제일이다.'하는 교만심을 일으켜 제 잘난 맛으로 살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비롯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자기가 제일'이라고 하면서 남을 무시하는 사람이 많다. 자기만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한 나라 전체를 통치하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까지 이러한 생각에 빠져 출마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대통령 감이 될 수 없다. 나만이 대통령 감이다. 내가 대통령이 되어야 이 나라가 바로 서리!"

이렇게 망자 존대(妄自尊大)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다면 그 나라의 꼴은 어떻게 되겠는가? 실로 우리 주위에는 자신을 높이고 '제 잘난 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 '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먼저 '나'의 육체를 관찰해보라.
이 몸뚱이는 물질에 불과하다.
물질이 차츰 낡아서 부서지듯이, 몸뚱이가 아무리 잘생기고 튼튼하더라도 별 수가 없는 것이다.
만리장성을 쌓은 진시황도 한줌 흙으로 바뀌었고, 그 잘났던 김일성도 마침내 죽어 염라대왕 앞으로 가 버렸다. 오래되면 물질은 사라지기 마련인 것이다.

'나'의 정신 또한 다를 바가 없다.
아무리 정신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변천하는 생각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한 생각이 일어나서는 잠시 머물다가 달라지고 사라져가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흐름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으로 구성된 '나'!
그 '나'는 끊임없이 변하다가 사라져 버리는,
무상하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 무상한 '나'를 대단한 것인 양 내세우고 있으면 고통만 따를 뿐,
멋있고 자유로운 삶이나 공부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말 잘살고자 하는 사람은 아상부터 없애야 한다.

아상을 없애는 공부! 그것이 바로 절이다.

"저의 가장 높은 머리를 불보살님의 가장 낮은 발아래 바치고 절하옵니다."

"저의 가장 귀중한 목숨을 바쳐 절하옵니다(歸命頂禮)."

만약 '나'를 높이는 아상을 버리고 절을 하여 하심(下心)을 할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실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마음을 낼 수 있게 되고, 참된 봉사를 하면 내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지며, 내 마음이 편안해지면 나를 대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도 편안해질 수가 있다. 이렇게 하여 일체 사람을 편안한 세계로 인도하면 대복전(大福田), 곧 큰 복밭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업장소멸(業障消滅), 곧 절을 많이 하여 속에 쌓은 업을 비워 내고자 함이다.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몸은 돌아다니는 변소요, 구정 물통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실로 그러하다. 아무리 얼굴을 예쁘게 꾸미고 화장을 했다고 해도 알고 보면 추하고 더럽기 짝이 없는 것이 우리의 몸뚱아리이다. 가죽피대 속에는 피와 고름과 때와 똥오줌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뿐인가? 제 마음에 맞으면 탐욕심을 내고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성을 내며, 탐하고 성내다 보니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여 시기, 질투, 아만, 방일 등 수많은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나아가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까지 곁들이고 있으니....

이러다 보니 우리의 마음 그릇은 완전히 구정 물통이 되고 말았다. 본래 깨끗하고 천진했던 항아리에 쓰레기 찌꺼기도 담고 쉰 밥도 담고 고기 뼈다귀도 담고.... 온갖 찌꺼기들을 자꾸 담다 보니 구정 물통이 되어 버린 것이다.
북적북적 속이 끓는 탁하디 탁한 구정 물통! 흉칙한 망상이 항상 출렁이는 구정 물통! 그 구정 물통이 꽉 차서 콸콸 넘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마음 그릇 구정 물통을 맑혀야 한다.

그러나 넘치는 구정 물통에 맑은 물 한 사발을 붓는다 하여도 별 소용이 없다. 맑히려면 구정 물통을 넘어뜨려 쏟아 버려야 한다. 그렇지만 배가 크고 모가지가 작아 넘어뜨려 쏟아 봐도 속의 것이 잘 나오지 않는다. 이제 별 도리가 없다. 오직 한 바가지 맑은 물을 붓고 흔들면서 냅다 쏟고, 한 바가지 물을 붓고 냅다 쏟고...... 오로지 거듭거듭 반복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와 같은 반복 작업이 절이다.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님을 간절히 찾는 것은 맑은 물을 붓는 것이고, 절하며 엎어지는 것은 구정 물통을 흔들면서 찌꺼기는 쏟아 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몇 번의 절로써는 속의 묵은 찌꺼기를 다 비워버릴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거듭거듭 절할 것을 옛 스님들은 강조하셨다. 적어도 108배, 1천배, 3천배, 5천배, 1만배의 절을 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렇게 거듭거듭 절하다 보면 업장이 소멸될 뿐만이 아니라, 내 마음의 그릇이 청정해지고 내 몸뚱이 그릇이 청정해지면서 몽중가피(夢中加被)도 나타나고 현증가피(顯證加被)도 나타나고 명훈가피(冥熏加被)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곧, '중생심의 물이 청정해지면 보살의 달 그림자가 거기에 나타난다(衆生心水淨 菩薩月影顯).'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맑히고 우리를 큰 복밭으로 만들어 주는 절. 이제 우리가 성의만 있으면 평소 능히 할 수 있는 108배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Posted by 하늘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