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2. 19:17
#소백산
2019년 6월 2일
소백산국립공원,
초암사~국망봉~비로봉~주목감시초소~비로사~삼가주차장
14.5km  4시간 10분,
소백산 멋진데, 특히 국망봉~비로봉간 천상의 초원은 탁 트인 하늘길과 산길이 맞닿아 눈이 시리게 푸르고 아름다움이 있음

월악산, 내장산 보다는 훨씬 낫구만
다음은 무등산으로...
Posted by 하늘위로
2009. 8. 9. 23:30
 

오늘날 불교이론에 의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여 존재하며
나라는 것도 무상하여 결국 사라지므로 나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나의 실체가 없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부처님은 현생에서 지은 것은 인과의 법에 의해 후생의 나에게 어김없이 이어지므로
팔정도로 심신을 닦고 공덕을 쌓으면 마침내 그 선근이 완성되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열심히 노력하는 제자들에게 부처가 될 거라는 수기를 주셨던 것이다.

만약 무아론의 논리대로 나의 실체가 없다면 좋은 공덕과 선근을 익혀
다음 생에 부처가 될 수기를 받는 윤회의 주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모든 나쁜 원인을 짓지 말고 모든 좋은 원인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는 칠불통계(諸惡莫作 衆善奉行)의 근거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무아설이 오늘날 불교의 기본 입장이라고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법무아는 불교의 기본원리로 윗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영혼의 실체에 대한 문제는 부처님이 논의를 거부했던 14무기 속에 들어있는 사항인데
후대 논사들에 의해 제법무아라는 결론으로 오늘날 불교의 윗자리에 당당히 자리잡고 있는 것은
그 정의가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부처님은 영원히 불변하는 나의 실체는 없지만
윤회를 통하여 경험의 지속성과 통일성을 가지며 변전하는 윤회의 주체는 있다고 말하셨다.

불경에서는 이를 비유로써 모순없이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많은 고리로 이루어진 사슬을 생각해보면
비록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연속적으로 이어진 가닥은 없지만,
각 고리가 서로 끊어지지 않고 하나의 사슬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고리 사이의 연결이 있어 동일체로서 연속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고 있는 인간의 단일성과 지속성도 같은 것은 아니지만
긴밀한 인과적 연결에 의하여 이어지기에 전체적으로 동일성을 유지되는 것이다.

다른 예로, 촛불을 생각해보자.
촛불은 단일한 불꽃으로 지속적인 빛을 주며 하나의 촛불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불꽃은 매순간 마다 타오르는 밑부분의 기름이 다른 것이니
현재의 빛과 과거의 빛과 미래의 빛이 같은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앞의 불꽃과 곧바로 이어지는 뒷 불꽃 사이에
앞이 없으면 뒤가 존재할 수 없는 긴밀한 인과적 연결이 있기에
불꽃이 하나로서 인식되는 것이다.

영혼도 이와 같다.

그동안 윤회주체와 관련한 논쟁은 초기불교 이래로 수천년간 이어져 왔으며
아직까지 명백히 밝혀지지 않아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러한 철학적 논란 대신에
의식과 윤회와 의식의 주체에 대한 실상을 밝힘으로써
무아의 논의에 대한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부처님의 법은 추상적 논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의 진실을 밝힘으로써 모든 희론을 잠재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은 기운의 형태 속에 의식이 깃들어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살아있을 때 육체 속에 거주하면서
완전한 인과법에 따라 삶의 모든 경험을 자신 속에 담게 되고
죽어서는 그 사람의 결실로 분리되어 이 법계를 맴돌며 후생의 원인이 된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영혼이라고 한다.

이렇게 한 인간의 삶의 결과로 나타나는 영혼은 자신이 지은 업과 인연에 따라 후생을 받게 되는데
성경말씀처럼 잘 지은 열매는 풍성한 수확을 낳고 잘못된 쭉정이는 버려지게 된다.

즉 욕망과 잘못된 삶으로 한과 집착 속에 죽은 이는
그 영혼이 편히 쉬지 못하고 지옥의 환상 속에서 고통을 받다 흩어지거나 소멸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 인간의 근본을 크게 망치지 않은 사람은
다시 인간으로 나며 그보다 더욱 승화한 자는 더 높은 차원인 천상에 나게 되는 것이다.

즉 바른 삶의 길을 알고 좋은 원인을 지은 자는 그 영혼이 맑고 깨끗해져
가벼운 것은 높이 오르는 자연의 원리에 의해 천상에 오르며
그 좋은 선근으로 말미암아 밝은 지혜와 좋은 마음을 지니고 태어나
마침내 해탈이라는 인간완성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순환과 재생의 흐름 속에는 우주 탄생의 비밀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반야의 관문이 있다.

즉 한알의 밀알이 완전히 썩지 않고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없듯이
모든 인간이나 신도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근원의 세계 속에 자신을 묻어야 하는데
이때 통과하는 관문을 반야라 한다.

즉, 사람이 죽으면 윤회하게 되는 영혼은
죽음과 더불어 깊은 잠에 빠지면서 반야로 스며들게 되는데
이곳에서 기존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현상인 것이다.

이곳은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근원의 자리여서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는 통과하지 못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자중에서는 모든 업이 사라져 마음이 청정해진 사람만이 이곳에 들 수 있으며
이곳에 든 자는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이며
근원에 닿을 수 있는 그 맑은 마음이 모든 것과 통하여 모든 법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에도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다에 듦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을 통과하여 새롭게 태어난 영혼은 깨끗한 상태로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런 관계로 새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잊고 백지상태로 태어나는 것이정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때 과거의 모든 기억은 사라지지만
과거 자신이 습득했던 지혜와 성품과 자질 등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

그것은 마치 콩을 심을 때 그 출생지가 어디인지 몰라도
콩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 그콩이 어떤 품종이며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사람도 과거에 그가 누구였는지 알 수가 없지만 그 사람의 성품과 기질을 보면
과거에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윤회의 흐름 속에는 육도를 오고가는 영혼의 이합집산이 있어
전생의 나와 후생의 내가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가 더욱 어렵다.

윤회의 흐름에서 인간의 영혼도 다른 생명체와 똑같은 생명의 질서에 의해 규율받는다.
그래서 가벼운 것은 높이 오르고 무거운 것은 낮은 곳으로 가라앉으며
약하고 희미한 것은 흩어지는 이치에 의해
승화한 영혼은 높이 오르며 타락한 영혼은 무거워 낮은 곳을 헤매다
고통 속에 흩어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때 완성으로 나아가는 영혼은 그 의식이 맑게 정화되어 점점 결정체(해탈심)가 되어가나
유계를 헤매는 영혼들은 인간의 근본도 간직하지 못하고 흩어져
미물의 영체나 풀의 기운이 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

마치 고등생물의 경우 종자를 적게 낳으나 하등생물은 많은 종자를 퍼뜨리는 것과 같은 현상이
인간의 영혼세계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니
인간의 영혼도 엄정한 생명의 질서에 의해 흩어져 다른 많은 생명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미물의 영체가 승화해 인간의 영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영혼이 후생의 영혼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다.
부처님이 영혼과 아의 실체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도 아가 아니고 저것도 아가 아니라고 아에 대한 단정을 피하셨으며(14무기)
나의 실체가 없다는 무아론은 주장하지는 않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이론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무아론이 정통이 되어 있으니
그 왜곡됨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실상이 이렇다고 하자, 기존에 윤회로 인한 동일성을 굳게 믿던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이 존엄성도 없이 인과의 질서에 의해 산술적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서로 알지 못한다면
지금의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미래의 나에게 미안하거나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서로 간에 기억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며
그 업은 완전한 인과법에 의해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다.

양지바른 곳에서 좋은 거름을 받아 잘 자란 콩은 반드시 다음번에 더 많은 콩을 맺고
황량한 곳에서 비실거리며 자란 콩은 반드시 쭉정이가 많듯이
앞뒤간에 기억은 이어지지 않아도 과거에 지은 일들은 반드시 후생에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니
양심있고 이성있는 자라면 자신이 지은 원인이 가져올 필연적인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져야 하는 것은,
그가 공중에서 펑하고 태어난 우주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인과적 고리로 이어지는 동일 연속선 상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하늘위로
2009. 8. 9. 23:28



 

남자친구에게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했는데 오해를 사서 이별을 당했습니다. 수개월이 지난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에게 다가가 진실을 털어놓고 싶은데 지금 서로의 처지가 좋지 않습니다. 또 많은 시간이 흘러가버려 용기 또한 나지 않습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이러저러한 현실 때문에 그에게 다가가기가 두렵습니다.

 

상대를 사랑한다면 상대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세요. 말할 시기 너무 고르지 말고 먼저 전화 걸어서 만나서 얘기 좀 하자고 해 보세요. 만나기 싫다고 하면 전화로라도 얘기할 테니 시간 좀 내라고 얘기해 보고 그것도 싫다면 끊고, 얼마 있다가 또 한 번 더 해 보고 그 때도 싫다고 하면, 얼마 있다가 또 해 보세요. 이렇게 끙끙 대며 하루를 보내는 것보다는 실제로 시도해서 한 3분 보내는 게 시간을 훨씬 효과적으로 쓰는 겁니다. 우리는 대부분 끙끙 대는 데 시간을 다 보내요.

 

나는 해명하고 싶은데 상대가 듣기 싫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대를 사랑한다면 상대의 의사를 당연히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사랑이라는 대부분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내가 해명하면 상대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에게 크게 잘못해 놓고 내가 사과했는데 상대가 사과를 받지 않으면 오히려 성질냅니다. ‘내가 사과하는데 안 받아줘?’ 이런 마음이 있단 말이에요. 이건 상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겁니다.

 

이렇게 망설이는 자기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봐야 합니다. 질문하신 분은 지금 상대에 대한 고려가 없습니다. 산에 올라갔다가 꽃이 예쁘다고 꺾어오는 사람하고 같아요. 꽃이 좋으면 그냥 보고 좋아하지 꺾긴 왜 꺾습니까? 꽃의 입장에서도 꺾이는 것이 좋은지 물어봐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쁜 꽃이 있으면 꺾어버린단 말이에요. 그것이 우리가 일방적이라는 반증입니다. 꽃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거든요. ‘내가 너를 좋아하면 네 목을 꺾더라도 너는 참아야 해, 너는 나를 따라야 해.’ 이런 생각이거든요. ‘내가 너를 좋아하는데 네가 어떻게 감히’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답답한 거예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전화하는 것이 상대를 위해서일까요, 답답한 자신을 위해서일까요? 본인이 답답해서 전화하는 거예요. 이것은 본인 문제예요. 상대편 문제가 아니에요. 상대를 고려하는 게 아니에요. 자신의 문제니까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내가 음식이 먹고 싶으면 가서 사먹듯이 내가 보고 싶으니까 전화하는 거예요. 열 번 거절하든 백 번 거절하든 그것은 그 사람 문제이고 나는 보고 싶으면 계속 전화하면 됩니다. 이러면 스토커가 됩니다. 이때 스토커가 된 자신을 스스로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그랬구나, 상대가 싫다는데 내가 좋아서 그랬구나, 산에 가서 꽃을 꺾듯이 내 마음대로 했구나.’ 하고 인정하면 됩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까지 괴롭힐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몇 번 해 보고 상대의 의사가 나와 다르다면 ‘나는 네가 좋지만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럼 알았다.’ 하고 놓아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혼자서 끙끙 대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이것은 상대를 고려하기 때문에 끙끙 대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든 내 욕심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서 끙끙 대는 것입니다. 이렇게 끙끙 대면 기회도 놓치고 본인만 괴롭습니다.

 

오늘 전화를 하세요. 전화해서 상대의 뜻을 일단 물어보세요. 어쩌면 상대도 당신을 만나려고 기다릴지도 모르지요. 누구나 한 번쯤은 마음에 있으면서도 한 번 거절했는데 상대가 다시 전화해주지 않으면 속으로 후회한 경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를 생각해서 몇 번쯤은 해 보세요. ‘세 번쯤 해서 확인해 보고, 그래도 싫다고 하면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자.’ 하고 가볍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포기하고 있다가 한 1년 후쯤 생각나면 또 한 번 해 보는 거예요. 그러다가 또 한 3년 있다가 생각나면 또 해 보는 거예요. 속으로 끙끙 대면 에너지만 많이 소모할 뿐입니다.

 

상대를 존중하면서도 가볍게 생각하고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하늘위로